바빌론의 공중정원은 실존했는가: 콜데바이 발굴과 니네베 가설

세계 7대 불가사의 가운데 위치조차 확정되지 않은 건축물이 있고, 그것을 묘사한 기록은 모두 그것이 서 있었다는 시대에서 수백 년 뒤의 글입니다. 증거가 없는 곳에서 이야기만 자란 셈입니다.

바빌론의 공중정원은 실존했는가를 묻는다면 1899년부터 1917년까지 바빌론을 판 콜데바이의 암거 구조와, 이라크 북부 제르완에 남은 수도교라는 두 가지 단서를 비교해야 합니다. 하나는 바빌론에, 다른 하나는 니네베에 걸려 있습니다.

정원이 있었다면 어디였는지, 그리고 없었다면 이야기가 무엇을 남겼는지 증거의 순서대로 따져 보겠습니다.

바빌론의 공중정원은 실존했는가 고대 유적 발굴 현장과 학술 조사

고대 그리스와 로마의 문헌들이 찬탄해 마지않았던 세계 7대 불가사의 가운데, 오늘날까지 그 실물 유적의 위치조차 명확히 확인되지 않은 유일한 건축물이 있습니다. 바빌론의 공중정원은 실존했는가, 바로 이 질문은 19세기 근대 고고학이 메소포타미아 평원에서 태동한 이래 학자들의 지적 호기심을 가장 강하게 자극한 미스터리입니다.

네부카드네자르 2세가 고향 산세를 그리워하던 왕비 아미티스를 위해 사막 한가운데 계단식 인공 낙원을 건설했다는 이야기는 낭만적인 고사로 널리 알려져 있습니다. 하지만 백여 년에 걸친 이라크 바빌론 유적의 대대적인 발굴 조사에도 불구하고, 이 거대한 정원의 물질적 흔적은 여전히 침묵을 지키고 있어 그 실체를 둘러싼 논쟁은 현재진행형입니다.

바빌론의 공중정원은 실존했는가: 콜데바이의 발굴과 바빌론 결손설

독일의 고고학자 로베르트 콜데바이(Robert Koldewey)는 1899년부터 1917년까지 바빌론 남부 궁전 일대를 체계적으로 발굴했습니다. 그는 궁전 북동쪽 구역에서 두꺼운 벽과 14개의 아치형 천장으로 이루어진 독특한 지하 암거 구조를 발견하고, 이곳이 정원을 떠받치던 기반 시설이자 수로 시스템이라고 확신했습니다.

콜데바이는 1899년부터 1917년까지 바빌론을 발굴했고, 궁전 북동쪽에서 두꺼운 벽과 14개의 아치형 천장 구조를 확인했다. 니네베 가설의 근거인 제르완 수도교는 50km 이상 떨어진 수원에서 물을 끌어왔다.
— 바빌론 발굴과 제르완 수도교 수치의 요약(통설 정리, 해석은 학자마다 다름)

이 수치에서 주목해야 할 행간의 의도는 ‘18년’과 ‘50km’의 대비입니다. 18년을 파고도 정원의 흔적이라 단정할 만한 증거가 나오지 않은 반면, 50km의 수로는 정원이 서 있을 만큼 물을 댈 기술이 다른 곳에 있었음을 보여 줍니다.

다만 콜데바이가 지하 구조를 정원의 기반으로 읽은 것은 문헌 묘사에 맞추려는 해석이었다는 비판이 있고, 제르완 수도교는 정원 자체가 아니라 수리 기술의 증거일 뿐입니다. 어느 쪽도 정원의 존재를 직접 증명하지 못하는 한계가 있습니다.

콜데바이는 돌과 방수용 역청, 짚을 섞은 특수 점토벽돌이 사용된 점을 들어 고대 그리스 기록 속의 관개 시설과 연결 지었습니다. 그러나 후대 연구자들의 정밀 재조사 결과, 이 아치형 공간은 중량 건축물을 지탱하는 지하 정원 기단이라기보다는 왕실의 물자를 보관하던 거대한 식량 및 행정 창고였다는 반론이 제기되었습니다.

로베르트 콜데바이의 바빌론 남궁 유적 발굴 기록과 아치 구조

가장 결정적인 난관은 당대 바빌로니아 문헌의 완전한 침묵이었습니다. 대규모 신전과 성벽, 도로 축조를 자랑스럽게 새겨 넣은 수만 점의 바빌론 점토판 쐐기문자 기록 어디에도 네부카드네자르 2세가 거대한 계단식 공중정원을 세웠다는 언급은 단 한 줄도 나타나지 않습니다.

비잔티움의 필론 기록과 니네베 이전설의 대립

공중정원의 상세한 묘사는 모두 바빌로니아 당대의 기록이 아니라, 수백 년 뒤 헬레니즘 및 로마 시대의 그리스 저술가들에게서 비롯되었습니다. 기원전 3세기 바빌론의 신관 베로소스의 기록을 인용한 요세푸스, 그리고 디오도로스 시켈로스와 스트라본의 지리지 등 2차 문헌들만이 공통적으로 유프라테스 강물을 끌어올린 아르키메데스 나선형 펌프와 층층이 쌓인 테라스 숲을 묘사했습니다.

이에 대해 옥스퍼드 대학교의 아시리아학자 스테파니 달리(Stephanie Dalley) 박사는 파격적인 대안 가설을 제시했습니다. 공중정원이 존재한 실제 무대는 바빌론이 아니라, 북쪽으로 수백 킬로미터 떨어진 아시리아 제국의 수도 니네베(Nineveh)였다는 주장입니다.

구분 전통적 바빌론설 달리 박사의 니네베설
축조 주체 신바빌로니아 국왕 네부카드네자르 2세 (기원전 6세기) 신아시리아 제국 군주 센나케립 (기원전 7세기경)
물질적 증거 남궁 지하 아치형 저장고 유적 (수로 기능 불명확) 제르완의 거대 수도교와 니네베 왕궁 부조 속 계단식 정원
문헌 기록 당대 쐐기문자 기록 부재, 수백 년 뒤 그리스 사료에 의존 센나케립 프리즘 비문에 “모든 사람을 위한 기적” 서술 확인

아시리아 센나케립 궁전 부조와 니네베 계단식 정원 쟁점

달리 박사는 아시리아의 왕 센나케립이 기원전 689년 바빌론을 정복한 뒤 니네베를 ‘새로운 바빌론’이라 선포했던 역사적 사실에 주목했습니다. 후대 그리스인들이 아시리아와 바빌로니아의 지리적 명칭을 혼동하면서, 센나케립이 지은 혁신적 정원의 실체가 바빌론의 네부카드네자르 2세의 치적으로 뒤바뀌어 전승되었다는 설명입니다.

제르완의 수로교 유적과 메소포타미아 수리 기술

니네베 가설을 뒷받침하는 결정적 고고학적 단서는 이라크 북부 제르완(Jerwan)에 남아 있는 거대한 석조 수도교 유적입니다. 1930년대 시카고 대학교 동양연구소의 조사 결과, 센나케립은 50km 이상 떨어진 산악 지대의 수원에서 물을 끌어오기 위해 수백만 개의 석회암 블록으로 아치교를 건설했습니다.

수도교 표면에 새겨진 아시리아 쐐기문자 명문에는 “나 센나케립은 멀리 떨어진 강물을 끌어와 왕궁의 과수원과 정원을 적셨다”는 구절이 또렷이 남아 있습니다. 대영박물관에 소장된 아슈르바니팔 궁전의 석조 부조에도 돌기둥 테라스 위에 나무가 자라고 수로로 물이 흐르는 입체 정원의 모습이 정밀하게 조각되어 있습니다.

이라크 제르완 석조 수도교 유적과 고대 메소포타미아 수리 공학 유물

반면 남부 메소포타미아의 바빌론은 평탄한 충적평야 지대로 수압차를 이용한 자연 유수가 불가능했습니다. 높이 수십 미터에 달하는 공중정원에 진흙벽돌의 부식을 막으며 막대한 양의 물을 끊임없이 끌어올리는 공학적 난제를 바빌론의 기술로 어떻게 해결했는지는 여전히 규명되지 않았습니다.

사료 비판으로 읽는 고대 그리스의 신화화와 문명관

그리스와 로마의 지식인들에게 메소포타미아는 끝없는 부와 사치, 그리고 경이로운 건축물이 가득한 오리엔트의 신비로운 공간이었습니다. 알렉산드로스 대왕의 동방 원정 이후 바빌론을 방문한 그리스 군인과 여행자들의 입을 거치며 동방의 거대한 궁전 원림은 문학적 수사가 덧붙여진 이상향으로 가공되었습니다.

대영박물관 소장 쐐기문자 점토판과 고대 그리스 사료 교차 검증

공중정원을 뜻하는 그리스어 ‘크레마스토스(kremastos)’는 공중에 허공 매달려 있다는 뜻이라기보다는, 돌출된 테라스나 회랑 위에 흙을 돋워 나무를 심은 다층 구조를 의미합니다. 그리스인들의 서구적 시선이 동방의 실제 수리 공학과 결합하면서 현실의 정원이 ‘기적의 불가사의’라는 환상적 이미지로 정착된 셈입니다.

공중정원이 유프라테스강 연안의 바빌론에 실존했든, 티그리스강 인근 니네베의 공학적 기적이 와전된 것이든 변하지 않는 진실이 있습니다. 메마른 사막에 물길을 열어 푸른 숲을 일구려 했던 고대 메소포타미아인들의 압도적인 토목 기술과 자연 정복의 열망만큼은 사료와 유적을 통해 선명하게 증명되고 있습니다.

이 글은 대영박물관 메소포타미아 유물 아카이브, 시카고 대학교 오리엔탈 연구소 발굴 보고서, 유네스코 세계유산센터 공인 사료를 바탕으로 정리했습니다.

공중정원 논쟁의 손익계산서: 이야기가 남긴 것

콜데바이의 발굴은 정원을 찾는 데는 실패했지만 바빌론 유적을 체계적으로 기록하는 학문적 성과를 얻었습니다. 반면 정원을 바빌론에 두려는 해석은 발굴 구조를 문헌에 끼워 맞춘다는 비용을 치렀습니다.

니네베 가설은 정원을 새로운 위치에 둠으로써 문헌 기록과 수리 기술을 연결하는 이득을 얻었지만, 아직 정원 터를 확인하지 못했다는 약점을 안고 있습니다. 그리스 저술가들은 사실의 확인보다 오리엔트의 이상향을 만들어 내는 데서 이득을 얻었습니다.

이 논쟁의 끝에 남는 것은 이라크 땅 위의 유적입니다. 바빌론의 두꺼운 벽돌 벽과 제르완에 남은 석회암 블록의 아치교가 실물로 존재하고, 정원은 아직 그 사이에서 이름만 남아 있습니다.

심화 질문으로 보는 바빌론의 공중정원 실존 논쟁의 이면

Q1. 공중정원의 묘사가 바빌로니아 당대의 기록이 아니라는 점은 왜 중요한가요?

디오도로스와 스트라본 같은 그리스 저술가의 묘사는 수백 년 뒤의 2차 문헌이고, 베로소스를 인용한 요세푸스도 마찬가지입니다. 당대 설형문자 기록에 공중정원이 나타나지 않는다는 점이 실존을 의심하게 만드는 핵심 근거입니다.

Q2. 니네베 이전설은 어떤 증거에 기대고 있나요?

이라크 북부 제르완의 석조 수도교는 센나케립이 산악 지대의 수원에서 물을 끌어오기 위해 건설한 것으로 정원이 있다면 이런 수리 기술이 필요했다는 점을 보여 줍니다. 그래서 공중정원이 바빌론이 아니라 니네베에 있었다는 가설이 제기됩니다.

Q3. 고대 그리스인들은 공중정원을 왜 신화화했나요?

알렉산드로스의 동방 원정 이후 바빌론을 방문한 그리스 군인과 여행자들의 이야기에 문학적 수사가 덧붙으며 동방의 궁전 원림이 부와 사치의 이상향으로 가공되었다고 설명됩니다. 정원은 사실보다 오리엔트에 대한 상상을 담은 이야기였을 가능성이 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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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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