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추픽추는 왜, 어떻게 만들어졌을까: 잉카 문명이 남긴 안데스의 미스터리

잉카인들은 마추픽추에 글자 한 자도 남기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이 도시가 언제, 누구를 위해 세워졌는지를 알려 주는 증거는 문서가 아니라 뼈와 돌입니다.

마추픽추는 해발 2,430미터 안데스 산등성이의 유적으로, 흔히 미스터리로 소비됩니다. 그러나 2021년 예일대 버거 연구팀의 유골 26점 분석은 이곳을 1420년 무렵부터 사람이 산 왕실 별장으로 가리킵니다. 문헌이 없는 자리를 방사성 탄소 연대와 석조 공학이 대신 채우고 있는 셈입니다.

건설 시기와 용도, 버려진 이유, 그리고 근대 발견자를 둘러싼 기록의 문제를 차례로 따져 보겠습니다.

마추픽추, 잉카 문명의 미스터리 제목 배너

마추픽추, 언제 누구에 의해 세워졌나

마추픽추는 15세기 중반 잉카 제국의 9대 황제 파차쿠티의 명령으로 건설된 것으로 전해져 왔습니다.

이후 그의 후계자 투팍 잉카 유팡키 대까지 건축이 이어졌다는 것이 방사성 탄소 연대 측정 결과와 일치합니다.

2021년 예일대학교 리처드 버거 교수 연구팀이 유골 26점을 분석했습니다.

그 결과 마추픽추는 대략 1420년부터 1530년까지 약 백여 년간 사람이 거주했던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이는 파차쿠티가 권좌에 오른 시기(1438년 무렵)보다 앞선 것으로, 통설보다 건설 시기가 이르다는 뜻입니다.

문헌에 기댄 통설을 방사성 탄소 연대 측정이라는 물증으로 수정한 연구라는 데 의미가 있습니다.

이 도시는 정찰 기지였을까, 왕의 별장이었을까

한때 마추픽추는 외적의 침입에 대비한 요새로 여겨지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존 로우, 리처드 버거 등 여러 학자가 연구를 거듭했습니다.

그 결과 오늘날 고고학계에서는 파차쿠티 황제 개인의 왕실 별장이었다는 해석이 더 힘을 얻고 있습니다.

인류학자 요한 라인하르트는 한 걸음 더 나아갔습니다.

마추픽추의 위치 자체가 우연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주변 신성한 산들과 특정 천문 현상이 일직선을 이루는 지점을 의도적으로 선택한 결과라는 견해입니다.

실제로 태양신전과 인티와타나(해시계 역할을 한 것으로 추정되는 석조물)의 배치는 동지와 하지의 태양 위치와 정교하게 맞물려 있습니다.

흥미로운 점은 이 별장이 왕위와 함께 세습되는 재산이 아니었다는 사실입니다.

파차쿠티 사후에도 그의 개인 소유로 남아, 1530년 무렵까지 사용되다가 버려진 것으로 보입니다.

석조 기술의 정수, 모르타르 없이 쌓아 올린 정교함

마추픽추의 건축은 전형적인 잉카 양식을 따르고 있습니다.

특징은 회반죽이나 모르타르를 전혀 사용하지 않고, 돌과 돌을 정밀하게 깎아 맞물리는 건식 석조 공법입니다.

태양신전, 세 개의 창문 신전 등이 대표적인 건축물로 꼽힙니다.

당시 마추픽추에는 상시 약 750명이 거주했던 것으로 추정되며, 이 중 대다수는 야나코나라 불린 지원 인력이었습니다.

최근 유전체 분석 결과, 이들의 혈통은 안데스, 해안, 에콰도르, 아마존 등 매우 다양한 지역에서 온 것으로 확인되었습니다.

이는 마추픽추가 제국 각지의 인력이 모인 다민족 공간이었음을 보여줍니다.

마추픽추 계단식 농경지 안데네스, 홍수를 막기 위한 정밀 공학

마추픽추의 계단식 농경지(안데네스) 전경, 잉카 시대 관개 및 배수 기술을 보여주는 유적
마추픽추의 계단식 농경지, 안데네스 (사진: F Delventhal, CC BY 2.0, Wikimedia Commons)

마추픽추 하면 떠오르는 계단식 농경지, 안데네스는 단순한 밭이 아니라 정교한 배수 공학의 산물입니다.

이 지역은 1450년 이후 연간 1,800밀리미터가 넘는 비가 내렸을 것으로 추정될 만큼 강수량이 많았습니다.

그래서 관개보다는 오히려 물을 효율적으로 빼내는 것이 더 중요한 과제였습니다.

1990년대 케네스 라이트 연구팀은 토양을 분석했습니다.

그 결과 안데네스는 다층 구조로 밝혀졌습니다.

하단에 큰 돌, 그 위에 자갈, 다시 모래와 자갈 혼합층, 맨 위에 비옥한 표토를 쌓은 형태였습니다.

이 표토는 산 위쪽이 아니라 계곡 아래에서 옮겨온 것으로 밝혀졌습니다.

잉카인들이 농업 생산성을 높이기 위해 상당한 노동력을 투입했음을 알 수 있는 대목입니다.

다만 실제 경작 가능한 면적은 약 4.9헥타르에 불과해, 상주 인구 750명을 모두 먹여 살리기엔 부족했습니다.

이 때문에 마추픽추의 식량 상당 부분은 인근 계곡이나 더 먼 지역에서 들여온 것으로 추정됩니다.

사라진 도시에서 다시 세상에 알려지다

1912년 예일대학교 탐사대의 하이럼 빙엄이 정리 작업 후 촬영한 마추픽추 전경 흑백 사진
1912년 하이럼 빙엄이 촬영한 마추픽추 (National Geographic Magazine, 1913, Public Domain)

마추픽추를 근대에 처음 기록한 인물은 1911년의 하이럼 빙엄이 아니라, 1902년 이곳을 방문한 페루인 탐험가 아구스틴 리사라가였습니다.

“아구스틴 리사라가, 1902”
— 마추픽추 세 개의 창문 신전 벽의 목탄 낙서

이 짧은 낙서에서 주목해야 할 행간의 의도는 ‘다녀갔다’는 선언입니다. 이름과 연도만 남긴 이 글자는 마추픽추를 학계가 아닌 개인이 먼저 기록했음을 보여 주며, 1911년의 발견 서사가 처음부터 끝까지 한 사람의 업적이 아니었다는 물증이 됩니다.

빙엄은 현지 농민의 안내를 받아 이곳에 올랐고, 그가 쓴 책과 탐사 기록이 국제 사회에 이 도시를 알렸기 때문에 발견자로 기억되었습니다. 낙서와 탐사 보고서 가운데 어느 쪽이 역사에 남는지는 유적의 가치가 아니라 기록을 대중에게 전달할 수 있는 힘에 달려 있었습니다.

그는 세 개의 창문 신전 벽에 자신의 이름과 방문 연도를 목탄으로 남겼습니다.

예일대학교 강사였던 빙엄은 1911년 이 지역을 답사하던 중 리사라가의 흔적을 발견했고, 초기 저술에서는 그를 실질적 발견자로 인정했습니다.

그러나 이후 저서에서 빙엄은 점차 자신의 역할을 부각시켰습니다.

결국 마추픽추를 국제적으로 알린 인물은 리사라가가 아닌 빙엄으로 널리 기억되게 되었습니다.

1983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되었고, 2007년에는 신(新) 세계 7대 불가사의 중 하나로 선정되었습니다.

마추픽추, 왜 버려졌을까

마추픽추는 16세기 중반, 스페인의 잉카 제국 정복이 진행되던 시기에 버려진 것으로 추정됩니다.

흥미로운 점은 스페인 정복자들이 실제로 이곳까지 도달했다는 명확한 기록이 없다는 사실입니다.

대신 학자들은 다른 가능성을 유력하게 제기하고 있습니다.

스페인인들이 도착하기 전 유럽에서 전파된 천연두가 먼저 안데스 지역에 퍼지면서, 마추픽추 주민 상당수가 목숨을 잃었을 것이라는 설명입니다.

잉카 제국의 통치 체제 자체가 붕괴하면서, 굳이 외부의 직접적인 파괴 없이도 왕실 별장으로서의 기능을 상실하고 자연스럽게 정글에 뒤덮였다는 것입니다.

마추픽추의 결산: 미스터리 서사가 가린 비용과 남은 것

잉카 왕실이 별장에서 얻은 것은 분명했습니다. 모르타르 없이 맞물리는 건식 석조와 폭우를 빼내는 계단식 배수 설계로, 연간 1,800밀리미터가 넘는 비가 내리는 산비탈에서도 도시가 유지되었습니다. 그러나 이 별장은 제국이 있어야 기능하는 시설이었습니다. 스페인의 직접 침입 없이도 천연두와 통치 체제의 붕괴로 주민과 기능을 잃고 정글에 덮였다는 설명이 유력합니다.

근대의 손익도 있습니다. 리사라가의 기록은 잊혔고 빙엄은 발견자로 기억되었으며, 그가 예일대로 가져간 유물은 페루 정부와의 분쟁 끝에 2011년부터 2012년 사이 반환되었습니다. 유적 자체의 가치와 별개로 누구의 기록이 역사가 되는지가 소유권 문제로까지 번진 사례입니다.

오늘날 마추픽추는 1983년 유네스코 세계유산에 등재되어 있고, 폭우와 산사태에 취약한 지형이라 안데네스의 배수 구조를 유지하는 일이 보존의 핵심입니다. 신비주의로 설명하지 않아도 되는 합리적인 공학이라는 점이 오히려 이 유적을 오래 지켜 온 이유입니다.

심화 질문으로 보는 마추픽추의 이면 (FAQ)

Q1. 방사성 탄소 연대 측정은 문헌 기록보다 왜 더 믿을 만한 근거가 되나요?

잉카인들은 문자 기록을 남기지 않았으므로 건설 시기는 전해 내려온 이야기나 유골 같은 물증으로 따질 수밖에 없습니다. 버거 연구팀은 유골 26점을 분석해 거주 시기를 1420년 무렵부터 1530년까지로 좁혔고, 이는 파차쿠티의 즉위 시기인 1438년 무렵보다 앞서 통설보다 이른 건설을 뜻합니다.

Q2. 마추픽추가 요새가 아니라 별장이라는 해석은 어떤 근거에 기대나요?

한때 외적에 대비한 요새로 여겨졌지만 존 로우와 버거 등 여러 학자의 연구가 쌓이면서 파차쿠티 황제의 왕실 별장이라는 해석이 힘을 얻고 있습니다. 상시 거주 인구가 약 750명으로 추정된다는 점과 방어보다 왕실 기능에 맞춘 건축 배치가 그 판단의 바탕이 됩니다.

Q3. 스페인군이 도달한 기록이 없는데도 마추픽추는 왜 버려졌나요?

스페인 정복자들이 이곳까지 왔다는 명확한 기록은 없습니다. 유력한 설명은 스페인인들이 도착하기 전 유럽에서 전파된 천연두가 먼저 안데스에 퍼져 주민 상당수가 목숨을 잃었고, 잉카 제국의 통치 체제가 무너지면서 왕실 별장의 기능이 사라졌다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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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자료 및 사료 출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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