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제타 스톤 해독 경쟁, 영국과 프랑스는 왜 사활을 걸었나

로제타 스톤은 이집트를 정복하러 온 프랑스군이 파낸 돌인데, 그 돌의 주인은 프랑스가 아닙니다. 해독의 영예는 프랑스인이 가져갔는데도 말입니다.

로제타 스톤 해독 경쟁은 돌이 발견된 1799년이 아니라 돌이 영국으로 넘어간 뒤에 본격화되었습니다. 석비의 내용은 신관들이 왕에게 바친 평범한 칙령이었지만, 같은 글이 세 가지 문자로 적혀 있다는 사실이 이집트 문자의 열쇠가 되었습니다.

프랑스와 영국이 석비를 두고 무엇을 얻고 잃었는지 사실 순서대로 따져 보겠습니다.

로제타 스톤 해독 경쟁을 다룬 문명과 미스터리 배너

이집트 원정군이 우연히 발견한 돌 하나

로제타 스톤은 1799년 7월 나일강 삼각주의 항구 도시 라시드, 당시 유럽인들이 로제타라 부르던 지역에서 발견되었습니다.

발견자는 나폴레옹 원정군 소속 공병 장교 피에르프랑수아 부샤르였으며, 그는 낡은 요새 쥘리앵을 보수하던 중 검은 화강섬록암 판석에 새겨진 글자를 알아보았습니다.

주목할 점은 나폴레옹의 이집트 원정이 순수한 군사 작전이 아니라 백수십 명의 학자와 기술자로 구성된 학술위원회를 동반한 사업이었다는 사실입니다.

이는 정복지의 지식을 체계적으로 수집해 프랑스 학문의 우위를 과시하려는 계몽주의적 야심과 제국주의적 욕망이 결합된 결과였습니다.

즉 로제타 스톤은 처음부터 순수한 고고학적 발견이 아니라 국가 프로젝트의 부산물로 세상에 나온 유물이었습니다.

세 가지 문자가 새겨진 이유

이 돌에는 상형문자, 민중문자로 불리는 데모틱, 그리고 고대 그리스어라는 세 가지 문자가 같은 내용을 담아 새겨져 있습니다.

높이 약 112cm, 너비 약 76cm, 두께 약 28cm, 무게 약 760kg의 석비. 상형문자 14행, 민중문자 32행, 그리스어 54행이 같은 칙령을 세 가지 문자로 적고 있음.
— 대영박물관 소장 로제타 스톤의 실측 정보(통설 정리, 행수는 남아 있는 부분 기준)

이 수치에서 주목해야 할 행간의 의도는 행수의 불균형입니다. 같은 내용이 상형문자 14행, 그리스어 54행으로 나뉘어 있다는 것은 글자 수와 줄 길이가 달라 정확한 일대일 대응이 불가능했다는 뜻이고, 그래서 해독이 단어 대조만으로 끝나지 않았습니다.

또한 칙령 자체는 기원전 196년 멤피스에서 프톨레마이오스 5세를 칭송한 신관들의 문서입니다. 학문적 보물이라는 평가는 후대가 붙인 것이며, 당대에는 왕권을 신관 집단이 공인하고 감세 등 혜택을 확인받는 정치 문서였다는 한계를 함께 읽어야 합니다.

본문은 기원전 196년 멤피스에서 프톨레마이오스 5세의 즉위 1주년을 기념해 이집트 사제단이 발표한 칙령으로, 왕에 대한 찬양과 세제 혜택 등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상형문자는 신전과 종교 의례를 위한 신성한 문자였고, 데모틱은 일상 행정에서 쓰이던 실용 문자였으며, 그리스어는 프톨레마이오스 왕조를 통치하던 마케도니아계 지배층의 언어였습니다.

세 문자가 나란히 새겨졌다는 사실 자체가 당시 이집트가 토착 사제 계급과 그리스어를 쓰는 지배 엘리트가 공존하는 이중 구조의 사회였음을 보여줍니다.

학자들에게는 바로 이 병기 구조가 결정적이었는데, 그리스어 부분은 이미 읽을 수 있었기에 이를 대조 텍스트로 삼아 나머지 두 문자를 역으로 풀어낼 단서를 얻을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로제타 스톤 해독 경쟁: 영과 샹폴리옹의 방법

영국의 박식가 토마스 영은 1814년 무렵부터 로제타 스톤 연구에 뛰어들어 데모틱 문자 일부가 표음적 요소를 지닌다는 점을 알아챘습니다.

그는 카르투슈, 즉 타원형 테두리 안에 갇힌 기호 묶음이 왕의 이름을 표기한 것이라는 직관도 얻어냈고, 실제로 프톨레마이오스라는 이름에 해당하는 표음 값을 상당 부분 맞혔습니다.

다만 영은 상형문자 전체가 근본적으로 표의문자, 즉 뜻을 그림으로 나타내는 체계라는 기존 통념에서 완전히 벗어나지는 못했습니다.

반면 프랑스의 샹폴리옹은 영의 초기 성과를 참고하면서도 필레섬 오벨리스크에 새겨진 또 다른 그리스어·이집트어 병기 자료를 확보해 클레오파트라라는 이름의 표음 값을 교차 검증했습니다.

이 교차 검증을 통해 샹폴리옹은 상형문자가 표음, 음절, 표의 기호가 뒤섞인 복합 체계이며 이것이 외국 이름뿐 아니라 순수 이집트어 단어에도 광범위하게 적용된다는 사실을 입증해냈습니다.

1822년 9월 그는 이 성과를 프랑스 금석학·문학 아카데미에 보낸 이른바 다시에 서한을 통해 공식 발표했고, 이 순간이 흔히 상형문자 해독의 완성으로 기록됩니다.

패전과 몰수, 알렉산드리아 협정의 굴욕

1801년 영국과 오스만 연합군에게 밀린 프랑스군은 알렉산드리아에서 항복 협정을 맺게 되었는데, 이것이 바로 알렉산드리아 협정입니다.

프랑스군 사령관 자크프랑수아 메누는 로제타 스톤을 비롯한 유물들을 자신의 개인 소유로 주장하며 반출을 시도했습니다.

그러나 영국군 사령관 존 헛친슨은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고, 학술위원회가 수집한 고대 유물 전체를 전쟁 전리품으로 영국에 넘기라고 요구했습니다.

결국 로제타 스톤은 영국 학자 윌리엄 리처드 해밀턴 등의 주도로 압류되어 군함 이집티엔호에 실려 영국으로 옮겨졌고, 1802년 조지 3세에게 헌정된 뒤 대영박물관에 소장되었습니다.

돌 표면에는 지금도 영국 측이 새겨 넣은 문구가 남아 있는데, 이는 이 유물이 전투에서 획득한 전리품임을 명시적으로 기록한 흔적입니다.

이처럼 로제타 스톤 해독 경쟁은 학문의 승부이기 이전에, 전리품을 둘러싼 두 나라의 힘겨루기에서 출발한 사건이었습니다.

로제타 스톤 해독 경쟁 뒤에 숨은 제국주의 자존심 싸움

영과 샹폴리옹의 경쟁은 단순한 학자 간 우선권 다툼을 넘어 나폴레옹 전쟁 이후 영국과 프랑스 사이에 팽배했던 국가적 자존심 대결과 겹쳐졌습니다.

프랑스는 전쟁에서는 패배했지만 학문에서만큼은 자국 학자가 인류사적 수수께끼를 풀어냈다는 사실을 통해 문화적 우위를 되찾고 싶어 했습니다.

영국은 이미 전리품인 돌을 소유하고 있었기에, 만약 해독까지 자국 학자 손에서 이루어진다면 물리적 소유와 지적 성취를 모두 거머쥐는 셈이었습니다.

이 때문에 영국 학계 일각에서는 샹폴리옹의 성과를 두고 영의 선행 연구를 표절했다는 비판이 오래도록 제기되었습니다.

이러한 유물 쟁탈과 해독 경쟁은 19세기 유럽 열강이 벌인 더 큰 흐름, 즉 이집트학이라는 신생 학문을 국가 위신의 척도로 삼았던 시대상을 압축적으로 보여줍니다.

실제로 이 시기 영국과 프랑스는 이집트뿐 아니라 그리스, 메소포타미아 각지에서 유물을 반출하며 자국 박물관을 채우는 경쟁을 벌였습니다.

로제타 스톤의 손익계산서: 프랑스, 영국, 이집트가 치른 값

영국이 얻은 것은 현물입니다. 1801년 알렉산드리아 협정으로 프랑스군이 수집한 유물이 영국 손에 넘어갔고, 석비는 대영박물관에서 전시되었습니다. 군사적 승리가 문화재의 소유권으로 곧바로 이어진 사례입니다.

프랑스는 석비를 잃었지만 해독의 명예를 가져갔습니다. 영의 선행 연구가 민중문자 일부를 풀어냈다 하더라도, 상형문자가 표음 기호와 표의 기호를 함께 쓴다는 사실을 밝혀 1822년 해독을 발표한 쪽은 샹폴리옹이었습니다. 반면 이집트는 석비의 실제 주인이었음에도 아무 값도 받지 못했고, 이후 반환을 요구해 왔습니다.

이 경쟁의 마지막 장면은 오늘도 런던의 전시실에 있는 화강섬록암 석비 한 덩어리입니다. 돌 옆면에는 영국군이 1801년 이집트에서 노획했다는 취지의 흰 글씨가 칠해져 있어, 학문의 열쇠이자 전리품이었다는 두 얼굴이 한 물건에 겹쳐 있음을 보여 줍니다.

심화 질문으로 보는 로제타 스톤 해독의 이면 (FAQ)

Q1. 그리스어 본문이 있었는데도 해독에 20여 년이 걸린 이유는 무엇인가요?

그리스어를 읽을 수 있어도 상형문자가 글자마다 소리를 나타내는지, 뜻을 나타내는지 알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또한 석비는 일부가 깨져 있어 세 본문을 줄 단위로 맞추기 어려웠고, 고유명사 카르투슈를 통해 소리 값을 추정하는 단계를 거쳐야 했습니다.

Q2. 토마스 영과 샹폴리옹의 기여는 어떻게 구분되나요?

영은 민중문자의 일부 단어를 그리스어와 대조하고 카르투슈 안의 이름을 읽는 데 기여했습니다. 샹폴리옹은 상형문자가 표음 요소와 표의 요소를 함께 쓴다는 체계를 밝혀 1822년 해독 결과를 발표했습니다. 두 사람의 평가는 문자의 부분을 푼 것과 체계를 푼 것의 차이로 나뉩니다.

Q3. 알렉산드리아 협정은 석비의 소유권에 어떤 영향을 주었나요?

1801년 협정에서 프랑스군이 수집한 이집트 유물이 영국에 넘겨졌고, 로제타 스톤도 영국으로 가서 대영박물관에 전시되었습니다. 이는 전쟁의 결과로 소유권이 이전된 사례로, 이집트 정부가 오늘날까지 반환을 요구하는 근거가 되기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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