첨성대는 정말 천문대였을까: 신라 31호 국보의 세 가지 학설
첨성대에 대한 신라의 기록은 돌을 쌓았다는 한 줄뿐이고, 그것이 하늘을 보는 곳이라는 말은 어디에도 없습니다. 우리는 천문대라는 이름을 천 년 뒤에 붙여 놓고 그 이름을 의심하지 않아 왔습니다.
첨성대는 정말 천문대였을까라는 물음은 1910년 와다 유지가 천문대로 규정한 뒤 해방 이후 교과서의 정설로 굳어진 관측대설에 대한 반론에서 출발합니다. 좁은 내부와 사다리, 흙 채움 같은 구조는 관측소로 쓰기에 불편하다는 지적을 낳았습니다.
관측대설과 제단설, 수리적 상징설이 각각 무엇을 설명하고 무엇을 놓치는지 사료의 순서대로 따져 보겠습니다.

경주 동궁과 월지 인근 평지에 서 있는 9미터 남짓한 화강암 축조물은 오랫동안 동양에서 가장 오래된 천문대로 교과서에 기록되어 왔습니다. 신라 선덕여왕 대에 축조된 국보 제31호, 바로 첨성대는 정말 천문대였을까라는 의문은 해방 이후 한국 역사학계와 과학사학계가 가장 치열하게 맞붙어 온 핵심 쟁점 중 하나입니다.
하늘을 관측하기에는 내부 구조가 지나치게 좁고 사다리를 타고 오르내리기 불편하다는 실측 결과가 나오면서 논쟁의 불씨는 걷잡을 수 없이 번졌습니다. 단순한 실용적 관측소였는지, 아니면 국가의 안녕을 비는 제단이자 우주를 형상화한 상징물이었는지 그 다양한 시각과 사료적 근거를 짚어봅니다.
첨성대는 정말 천문대였을까: 통설인 실용적 관측대설
일제강점기 조선총독부 관측소장을 지낸 일본의 기상학자 와다 유지(和田雄治)는 1910년 발표한 논문에서 첨성대를 상부에서 천문 관측을 수행하던 천문대라고 규정했습니다. 해방 이후 이 관점은 초대 국립중앙관상대장을 지낸 이원철 박사와 과학사가 전상운 교수로 이어지며 오랫동안 대한민국 역사 교육의 정설로 자리 잡았습니다.
실용적 관측대설을 지지하는 연구자들은 정상부의 정(井)자형 두석 위에 관측 기구를 올려두거나 관측자가 누워 밤하늘의 성좌와 유성, 일식과 월식을 관측했다고 봅니다.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데이터베이스에 수록된 「삼국사기」 신라본기에는 선덕여왕 이전부터 수많은 천문 관측 기록이 실려 있어, 국가 차원의 상설 관측 기구가 필수적이었다는 설명입니다.

실제로 비정기적인 천체 이변을 관찰하는 것은 고대 왕권의 정당성을 증명하고 농경의 절기를 백성에게 알리는 역법(曆法)의 핵심 기반이었습니다. 비록 구조적인 제약이 있더라도 당시 기술 수준에서 하늘의 징후를 살피는 관측소 역할을 병행했을 가능성은 여전히 배제할 수 없습니다.
제단설과 수리적 상징설: 구조적 한계가 낳은 반론
하지만 1960년대 이후 역사학계 내부에서 기존 관측대설을 정면으로 반박하는 실증적 반론들이 쏟아져 나왔습니다. 역사학자 김용섭 교수는 첨성대 내부의 흙 채움과 비좁은 창문 구조를 지적하며, 이곳이 천문 관측소가 아니라 농업과 직결된 천신에게 제사를 올리던 제단(祭壇)이었다는 학설을 제시했습니다.
이후 미술사학자 고유섭의 연구와 조자호의 견해를 발전시킨 연구자들은 첨성대가 불교의 우주관인 수미산(須彌山)을 본뜬 제천 의례 건축물이라는 주장을 내놓았습니다. 건축 구조 자체가 천체를 직접 들여다보는 망루라기보다는, 하늘의 법칙을 땅 위에 숫자로 구현한 거대한 상징탑이라는 시각입니다.
| 학설 구분 | 주요 논리와 건축 근거 | 대표 학자 및 한계점 |
|---|---|---|
| 실용적 관측대설 | 정상부 정자석 위에 기구를 설치해 일식, 월식, 혜성 등을 직접 육안 관측함 | 전상운, 나일성 등 지지. 내부 계단이 없고 출입과 활동 공간이 협소함 |
| 제단 및 의례설 | 하늘과 소통하고 풍요를 기원하는 제천 의례용 종교적 제단으로 사용됨 | 김용섭 등 주장. 의례의 구체적 절차를 입증할 당대 문헌 사료가 부족함 |
| 수리 상징탑설 | 28수 별자리, 24절기, 1년 일수(365일)를 돌의 단수와 개수로 상징화함 | 송민구, 박성래 등 연구. 숫자의 우연의 일치 가능성과 실용성 의문 상존 |

실제로 첨성대를 구성하는 석재 수치에는 정교한 역법 체계가 숨어 있습니다. 원통형 몸체 27단은 선덕여왕이 신라 제27대 군주임을 나타내고, 정상부 정자석을 합친 28단은 동양 별자리의 기본인 28수를 상징한다는 해석이 설득력을 얻고 있습니다.
기단석까지 포함한 29단과 30단은 음력 한 달의 날수를 뜻하며, 사용된 부재의 총개수가 약 365개 안팎으로 1년의 날수와 맞아떨어진다는 점은 신라 장인들이 고도의 수리 천문학 지식을 석조물에 의도적으로 투영했음을 시사합니다.
사료의 침묵: 삼국유사와 세종실록지리지의 기록 차이
첨성대의 기능을 둘러싼 논쟁이 백 년 넘게 결론을 내리지 못하는 근본적인 원인은 고대 사료의 절대적인 부족에 있습니다. 신라 당대의 상세한 기록은 전하지 않으며, 후대의 문헌들은 서로 다른 시각을 담고 있습니다.
“鍊石築瞻星臺” (돌을 다듬어 첨성대를 쌓았다)
— 『삼국유사』 기이 선덕왕 조 별기(문구의 취지, 번역은 책마다 다름)
이 짧은 기록에서 주목해야 할 행간의 의도는 ‘쌓았다’는 동사만 있고 용도가 없다는 점입니다. 천문 관측, 제사, 상징 어느 쪽도 문장에서 읽어 낼 수 없으므로 모든 학설은 이 한 줄에 자기 해석을 덧입힌 것입니다.
또한 이 기록은 신라 당대가 아니라 13세기 일연이 별기를 인용해 남긴 것이어서, 축조 후 수백 년의 간격이 있습니다. 후대에 이미 용도가 불분명해졌을 가능성이 있다는 점이 기록의 한계입니다.
일연의 「삼국유사」 기이편 선덕여왕 조에는 “선덕여왕 대에 돌을 다듬어 첨성대를 쌓았다(別記云 是王代 鍊石築瞻星臺)”라는 단 한 줄의 기사만 전할 뿐 구체적으로 어떤 행위가 이루어졌는지는 적혀 있지 않습니다.

조선 초기에 편찬된 「세종실록」 지리지와 「신증동국여지승람」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사람이 가운데로 올라가 천문을 관측했다”는 구체적 서술이 등장합니다. 이는 신라 멸망 수백 년 뒤 고려와 조선의 유학자들이 바라본 기능적 해석이 덧씌워진 것일 수 있어 사료 비판의 주의가 요구됩니다.
국립경주문화유산연구소의 주변 발굴 조사에서도 천문 관측 장비의 실물 파편은 출토되지 않았습니다. 결국 문헌의 단편성과 유물의 부재가 다채로운 상상력과 학문적 가설의 여지를 동시에 남겨둔 셈입니다.
사료 비판과 융합적 복원의 관점
현대 고고천문학과 과학사학계는 실용 관측소와 종교적 상징물이라는 이분법적 대립을 넘어, 두 기능의 복합적 결합에 주목하고 있습니다. 근대 과학의 잣대로 고대의 유적을 ‘순수한 과학 기구’와 ‘미신적 제단’으로 엄격히 분리하려는 태도 자체가 서구식 편견일 수 있기 때문입니다.

고대 신라에서 천문학은 순수한 자연과학이 아니라, 하늘의 뜻을 읽어 국가의 길흉을 점치고 왕권을 신성화하는 점성술 및 정치 종교 체계와 일체화되어 있었습니다. 첨성대는 남쪽 창문으로 쏟아지는 태양 광선으로 춘분과 추분의 절기를 측정하는 규표(圭表) 역할을 하면서도, 그 자체로 우주의 질서를 대변하는 국가적 기념비였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천 년을 버텨온 화강암의 유려한 곡선 속에서, 우리는 하늘을 경외하며 백성을 다스리고자 했던 7세기 신라인들의 치열한 과학적 사유와 종교적 염원을 함께 읽어내야 합니다.
이 글은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데이터베이스, 국립문화유산연구원, 한국학중앙연구원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의 공개 사료와 공인 연구 자료를 바탕으로 정리했습니다.
첨성대 논쟁의 손익계산서: 이름이 얻은 것과 잃은 것
천문대라는 이름이 얻은 것은 자긍심입니다. 동양에서 가장 오래된 천문대라는 서사는 교육과 문화재 정책에서 강력한 상징이 되었고, 국보 제31호의 위상을 키웠습니다. 대신 구조가 맞지 않는다는 반론이 나올 때마다 그 서사가 설명해야 할 부담을 졌습니다.
제단설과 상징설은 구조의 모순을 설명하는 이득을 얻었지만, 신라 당대의 직접 증거가 없다는 한계를 같은 수준으로 안고 있습니다. 융합설은 양쪽의 장점을 취하되 반증하기 어려운 절충에 가깝다는 비용을 치릅니다.
이 논쟁의 마지막에 남는 것은 경주 평지에 서 있는 높이 9미터 남짓한 화강암 구조물입니다. 정면 중간에 뚫린 창과 안쪽에 채워진 흙이라는 구조만이 말없이 남아 어느 학설도 확정하지 못한 채 여전히 같은 자리에 있습니다.
심화 질문으로 보는 첨성대 천문대설의 이면 (FAQ)
Q1. 관측대설은 누가, 어떤 근거로 처음 주장했나요?
일제강점기 조선총독부 관측소장을 지낸 일본의 기상학자 와다 유지가 1910년 논문에서 첨성대를 상부에서 천문 관측을 수행하던 천문대로 규정했습니다. 해방 이후 이원철과 전상운이 이 관점을 이어받아 오랫동안 정설이 되었습니다.
Q2. 제단설은 구조의 어떤 점을 문제 삼았나요?
역사학자 김용섭은 첨성대 내부의 흙 채움과 비좁은 창문 구조를 지적하며, 이곳이 농업과 직결된 천신에게 제사를 올리던 제단이었다고 보았습니다. 관측 기구로서의 기능과 맞지 않는 구조가 반론의 핵심입니다.
Q3. 실용 관측소와 종교적 상징물이라는 이분법은 왜 비판받나요?
고대 신라에서 천문학은 순수한 과학이 아니라 하늘의 뜻을 읽어 정치와 제사에 연결하는 행위와 분리되지 않았습니다. 근대 과학의 잣대로 순수한 과학 기구와 미신적 제단을 가르는 태도 자체가 서구식 편견일 수 있다는 지적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