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해 고구려 계승 이유 문헌과 유물이 말하는 쟁점 정리

발해의 왕은 일본에 보낸 국서에 고구려의 옛 땅을 회복했다고 썼고, 당의 사서는 발해를 말갈 계통이라고 적었습니다. 같은 나라가 자기 문서에서는 계승자로, 이웃 제국의 문서에서는 변방의 한 갈래로 기록된 셈입니다.
발해 고구려 계승 이유를 따지는 일은 이름을 어떻게 불렀는지, 무엇을 땅에 남겼는지 두 가지 증거를 맞대어 보는 작업입니다. 무왕의 국서와 온돌 유적, 정효공주 묘의 양식이 한쪽에 있고, 구당서와 신당서의 상충된 서술이 다른 쪽에 있습니다.
각 증거가 계승론에 무엇을 보태고 무엇을 덜어 내는지 자료의 순서대로 따져 보겠습니다.
문헌 사료에 나타난 발해의 자기 인식
과연 발해는 고구려의 영광을 이어받은 국가였을까요?
“復高麗之舊居 有扶餘之遺俗” (고구려의 옛 땅을 회복하고 부여의 풍속을 보존하고 있다)
— 『속일본기』에 전하는 발해 무왕의 국서(727년 발송, 문구의 취지와 번역은 책마다 다름)
이 짧은 기록에서 주목해야 할 행간의 의도는 ‘회복’이라는 동사입니다. 외교 문서에서 스스로를 고구려의 옛 땅을 되찾은 나라로 규정하는 것은 단순한 혈연 주장이 아니라 일본과의 교섭에서 정통성과 위상을 확보하려는 외교 전략의 일부였습니다.
다만 이 구절은 발해 쪽 자기 인식이지만 외교 수사일 수 있다는 한계가 있습니다. 일본에 보낸 국서는 상대의 호의를 얻으려는 문장이므로, 이 문장 하나로 계승 여부를 단정하려면 고고학 자료의 지지가 필요합니다.
국사편찬위원회의 한국역사정보통합시스템에 실린 속일본기와 유취국사 등 고대 외교 기록을 보면 다음과 같은 내용이 확인됩니다.
727년 발해의 무왕은 일본에 사신을 보내며 자신을 고려 국왕(高麗國王)이라 칭했습니다.
당시 고려는 고구려를 지칭하는 정식 국호였으므로 이는 대외적으로 고구려의 정통성을 이어받았음을 선포한 결정적 대외 선언입니다.

문왕 시대에 이르러서도 일본 조정은 발해 사신을 ‘고려 사신’이라 불렀습니다.
중국의 구당서 역시 대조영을 고구려의 별종이라 기록하여 혈연적, 문화적 연관성을 정사로 명시해 두었습니다.
중국 정사와 우리 사료의 시각 차이와 역사적 쟁점
동북공정을 비롯한 현대 학계의 이견은 주로 중국 측 사료의 자의적 해석에서 비롯됩니다.
구당서와 신당서의 기록은 문맥의 미세한 차이에 따라 발해를 바라보는 관점을 완전히 다르게 뒤흔들어 놓기도 합니다.
| 비교 구분 | 중국 구당서 (舊唐書) | 중국 신당서 (新唐書) | 속일본기 및 유취국사 |
|---|---|---|---|
| 대조영의 출신 | 고려별종 (고구려의 지류) | 속말말갈 권수 (말갈족 추장) | 고려의 옛 땅을 회복한 국왕 |
| 사상적 인지 | 고구려 유민의 중심적 결집 | 지방 정권 성격으로 왜곡 | 고구려 왕권을 완전히 계승 |
| 학계의 해석 | 지배층의 고구려 정체성 입증 | 피지배층 다수를 악용한 왜곡 | 국제 사회가 인정한 고구려 후계 |
고고학 유물이 증명하는 발해 고구려 계승 이유
사료의 텍스트 논쟁을 잠재우는 가장 강력한 무기는 땅속에서 발굴된 유물의 문양과 건축 양식입니다.
러시아 연해주와 상경용천부 유적지의 발굴 보고서를 보면 다음과 같은 사실이 확인됩니다.
발해의 왕궁터와 가옥 유적지에서는 한반도 고유의 난방 시스템인 온돌(쪽구들)이 대규모로 출토되었습니다.
다만 쪽구들은 말갈 계통 유적에서도 확인되어 온돌만으로 계승을 단정하기는 어렵습니다. 그럼에도 발해 중심부에서 이 난방 방식이 널리 쓰였다는 점은 생활문화에서 고구려와의 연속성을 보여 주는 근거의 하나로 평가됩니다.

뿐만 아니라 발해 사찰에서 발견되는 기와막새의 연꽃무늬는 고구려 기와의 날카롭고 힘찬 선을 그대로 구현해 냈습니다.
불상 제작에 쓰인 이불병좌상 양식 역시 고구려의 불교 예술 전통을 창조적으로 전승한 결과물입니다.
지배층과 피지배층의 이중 구조 미스터리와 진실
일부 왜곡된 학설에서는 발해가 고구려 유민 소수와 말갈족 다수로 구성되었다는 이유를 들어 고구려 계승을 부정하려 합니다.
그러나 이는 고대 고구려 후기 사회의 다민족 결집 구조를 온전히 이해하지 못한 모순입니다.
말갈족은 이미 고구려 전성기 시절부터 고구려의 지방 백성으로 동화되어 함께 세금을 내고 군인으로 활약하던 존재였습니다.
따라서 대조영이 발해를 건국할 때 합류한 말갈족 역시 스스로를 당나라의 변방 이민족이 아닌 고구려 영토의 일원으로 인식하고 있었습니다.
남북국시대 사상 확립과 현대 고증의 중요성
조선 후기의 실학자 유득공은 그의 저서 발해고에서 신라와 발해를 병립시켜 우리 역사를 ‘남북국시대’로 불러야 한다고 최초로 주장했습니다.
신라 중심의 단선적 역사관에서 벗어날 때 비로소 만주 대륙을 호령하던 고구려 영토의 온전한 역사가 부활합니다.
동북아의 평화적 역사 공동체 구축을 위해서도 발해 고구려 계승 이유는 매우 중대한 나침반입니다.
단순한 감정적 민족주의를 지양하고 철저히 발굴된 금석문과 사료의 교차 검증을 기반으로 논리를 다져야만 왜곡된 역사 공세를 완벽하게 방어해 낼 수 있습니다.

계승 논쟁의 손익계산서: 어느 해석이 무엇을 얻는가
계승론이 얻는 것은 한반도 역사의 공간적 확장입니다. 유득공이 발해고에서 신라와 발해를 병립시킨 남북국시대의 틀은 만주까지 이어지는 고구려의 역사를 한국사에 포함시키는 이득을 주었고, 발해를 한국사의 일부로 읽는 근거가 됩니다.
반대로 중국 측의 해석은 발해를 당의 지방 정권으로 규정해 영토와 역사의 귀속을 확보하려는 정치적 이득을 노리지만, 무왕의 국서와 고고학 자료가 가리키는 연속성과 충돌하는 비용을 치릅니다. 계승론 역시 말갈 계통 주민의 비중이 컸다는 점을 설명해야 하는 복합성의 비용을 안고 있습니다.
이 논쟁의 마지막에 남는 것은 흙 속의 유물입니다. 상경용천부와 연해주 유적에서 나온 온돌과 연꽃무늬 기와, 정효공주 묘의 벽돌 구조는 어느 나라의 교과서에도 속하지 않은 채 같은 자리에 놓여 있습니다.
심화 질문으로 보는 발해 고구려 계승 이유의 이면 (FAQ)
Q1. 대조영의 출신에 대한 상충된 기록은 계승론을 약화시키나요?
구당서는 고려별종, 신당서는 속말말갈로 기록해 서로 상충됩니다. 현대 학계는 대조영을 고구려화된 말갈계 유민이거나 고구려 변방 거주민으로 해석하며, 출신 한 줄보다 출토된 무덤 양식과 국가 정체성의 선언이 고구려의 연속성을 보여 준다는 점이 강조됩니다.
Q2. 온돌 유적은 계승의 결정적 증거가 될 수 있나요?
상경용천부와 가옥 유적에서 쪽구들이 대규모로 출토되었지만, 쪽구들은 주변 지역에서도 나타날 수 있어 단독 증거로 보기는 어렵습니다. 무덤 양식, 연꽃무늬 기와막새와 함께 종합해서 읽을 때 설득력이 커집니다.
Q3. 발해 멸망 후 고려로 망명한 유민은 계승론에 어떤 근거가 되나요?
926년 발해가 거란에 멸망한 뒤 태자 대광현을 비롯한 수만 명의 지배층과 유민이 고려로 대거 망명했고, 고려 조정은 이들을 동포로 환대했습니다. 이는 당대 사람들이 두 나라의 연속성을 의식했다는 간접 증거로 거론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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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자료 및 출처 안내
본 콘텐츠는 남북국시대 역사 교차 고증과 발해 유적지의 고고학적 분석을 위해 아래의 공신력 있는 기관의 검증된 사료와 논문을 바탕으로 서술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