붕당정치 시작 변질 이유: 당쟁의 구조적 원인을 읽다
붕당정치는 조선을 망친 소모적 당쟁이었을까요? 이 질문에 답하기 전에 불편한 사실이 하나 있습니다. 당쟁이라는 틀을 굳힌 시초로 꼽히는 글이 1907년 일본인 학자 시데하라 다이라의 「한국정쟁지」라는 점입니다.
붕당정치 시작 변질 이유를 따라가면 답은 사람의 못남이 아니라 구조에 있습니다. 1575년 이조전랑 후임 문제로 갈린 동서분당에서 출발한 붕당은 인조에서 현종 대까지 50여 년간 서인과 남인이 공존하는 정책 경쟁 체제로 작동했지만, 예송논쟁과 환국을 거치며 상대의 존립을 부정하는 싸움으로 바뀌었습니다.
이 체제가 처음엔 어떻게 작동했고 나중엔 왜 무너졌는지, 식민 사관의 프레임까지 득실로 읽어 보겠습니다.

사림 정치의 구조에서 찾다
붕당정치는 16세기 후반, 오랜 기간 권력을 쥐고 있던 훈구파가 물러나고 사림이 중앙 정계를 장악한 직후에 등장했습니다.
문제는 사림 내부에도 세대와 입장의 차이가 있었다는 점입니다.
기성 사림과 신진 사림 사이에는 척신정치의 잔재를 어디까지 청산할지를 둘러싼 온도차가 있었습니다.
이 갈등이 표면화된 계기가 인사권을 쥔 이조전랑 자리를 둘러싼 다툼이었습니다.
이조전랑 자리를 둘러싼 다툼이 왜 문제가 되었을까
1575년(선조 8년), 신진 사류 김효원과 외척 심의겸 계열 사이에서 이조전랑 후임 문제로 갈등이 불거졌습니다.
「동서분당」이라 불리는 이 사건이 붕당정치의 공식적인 출발점으로 꼽힙니다.

율곡 이이는 두 세력의 갈등을 중재하려 애썼지만, 1584년 그가 세상을 떠나면서 완충 역할이 사라졌습니다.
이후 사림은 동인과 서인으로 완전히 갈라섰습니다.
초기 붕당은 정말 나쁜 것이었을까
흥미로운 지점은, 형성 초기의 붕당이 지금 떠올리는 이미지와는 사뭇 달랐다는 사실입니다.
인조 대부터 현종 대까지 50여 년간 서인과 남인은 서로를 완전히 배제하지 않고 공존했습니다.
붕당(朋黨)은 개인적 이익을 좇는 파벌이 아니라, 학문과 정책 노선을 공유하는 정치 집단을 뜻했습니다.
사림들은 이를 통해 서로를 공론의 이름으로 비판하고 견제하는 구조를 만들고자 했습니다.
상대 붕당을 조정에서 완전히 몰아내기보다, 정권을 주고받으며 서로의 정책을 검증하는 방식이 이 시기의 특징이었습니다.
문제는 이 균형이 오래가지 못했다는 점입니다.
예송논쟁, 정책 논쟁이 이념 대결로 번진 순간
붕당정치의 성격이 바뀌기 시작한 결정적 계기는 예송논쟁이었습니다.
“군자는 도를 같이하는 것으로 붕(朋)을 삼고, 소인은 이익을 같이하는 것으로 붕을 삼는다. 이것이 자연스러운 이치이다.”
— 구양수, 「붕당론」(1044년, 의역)
이 짧은 문장에서 주목해야 할 행간의 의도는 붕당을 도덕의 기준으로 갈라 놓은 점입니다. 조선 사림은 이 논리를 빌려 자신들의 정치 결사를 사익의 파벌이 아니라 도를 같이하는 군자의 결집으로 설명할 수 있었고, 그래서 붕당은 처음에 학문과 정책 노선을 공유하는 집단으로 긍정될 수 있었습니다.
같은 논리에는 위험도 있었습니다. 우리 쪽이 군자라면 상대는 소인이 되기 때문입니다. 예송논쟁을 거치며 상대 붕당을 군자와 소인으로 가르는 흑백논리가 자리 잡은 것은 이 틀이 공존의 근거에서 배제의 근거로 뒤집힌 순간이었습니다.
1659년 기해예송과 1674년 갑인예송, 두 차례에 걸쳐 서인과 남인은 자의대비의 상복 기간을 두고 격돌했습니다.
예송논쟁은 정말 상복 예법 하나 때문이었을까
표면적으로는 예법 논쟁이었지만, 실제로는 효종의 왕위 정통성과 직결된 문제였습니다.
차남으로 왕위에 오른 효종을 적장자와 동일하게 대우할지가 핵심 쟁점이었습니다.

이 논쟁을 거치며 상대 붕당을 정책이 다른 동료가 아니라 군자와 소인으로 가르는 흑백논리가 자리 잡았습니다.
이때부터 붕당 간 공존의 전제 자체가 흔들리기 시작했습니다.
환국정치, 견제에서 숙청으로
예송논쟁 이후의 변화는 숙종 대에 이르러 제도화됩니다.
숙종은 즉위 기간 동안 여러 차례 정권을 한꺼번에 교체하는 방식을 반복적으로 사용했습니다.
1680년 경신환국으로 남인이 축출되고, 1689년 기사환국으로 서인이 몰락했으며, 1694년 갑술환국으로 다시 남인이 밀려났습니다.
이런 급격한 정권 교체를 ‘환국’이라 부릅니다.
| 구분 | 붕당정치 초기(선조~현종) | 환국정치 이후(숙종~) |
|---|---|---|
| 갈등 해결 방식 | 공론과 상호 비판을 통한 견제 | 왕이 주도하는 급격한 정권 교체 |
| 패배한 붕당의 처지 | 조정에 남아 견제 역할 지속 | 대규모 축출과 처형, 유배로 이어짐 |
| 정치적 프레임 | 정책과 학문 노선의 차이로 인식 | 상대를 역적 혹은 소인으로 규정 |
| 왕의 역할 | 붕당 간 균형을 조율하는 조정자 | 환국을 통해 정국을 직접 전환하는 주체 |

탕평책, 붕당정치를 되돌리려 한 시도와 그 한계
거듭된 환국이 초래한 피해는 후대 왕들에게 경각심을 남겼습니다.
경신환국 직후 박세채는 옳고 그름을 가리는 대신 인재의 우열로 평가하자는 탕평론을 제시했습니다.
이를 본격적으로 받아들인 것이 영조였습니다.
1728년 무신란을 겪은 뒤 이듬해 기유대처분을 통해 붕당을 초월한 인재 등용을 표방하며 탕평정치를 시작했습니다.
다만 탕평책도 완전한 해법은 아니었습니다.
붕당 간 견제가 약해진 자리를, 결국 왕과 가까운 소수 가문이 채우면서 19세기 세도정치로 이어지는 결과를 낳았습니다.
당쟁이라는 프레임은 어디서 왔을까
붕당정치를 ‘무조건 나쁜 당쟁’으로 단순화하는 시각에는 특정한 역사적 배경이 있습니다.
1907년 일본인 학자 시데하라 다이라는 「한국정쟁지」에서 무오사화를 당쟁의 기원으로 지목했습니다.
그는 조선의 붕당을 개인 간 감정싸움으로 설명하며, 이를 조선인의 분열적 민족성 탓으로 돌렸습니다.
이 논리는 일제강점기 동안 식민 통치를 정당화하는 수단으로 활용되었습니다.

1980년대 들어 이태진 등의 연구자들은 이런 시각을 비판하며 ‘붕당정치론’을 제기했습니다.
1987년 발표된 「당파성론 비판」을 계기로, 이 주장은 이후 교과서 서술에서도 상당 부분 반영되었습니다.
다만 이는 붕당정치의 변질 자체를 부정하는 것은 아닙니다.
문제는 붕당이라는 제도 자체가 아니라, 예송논쟁 이후 공존의 원칙이 무너지고 환국이라는 방식으로 정치가 운영된 데 있었다고 보는 것이 현재 학계의 대체적인 시각입니다.
결국 붕당정치의 역사를 “당쟁이 나라를 망쳤다”는 한 문장으로 정리하기엔 아쉬운 부분이 많습니다.
이 체제는 원래 상호 비판과 견제라는 나름의 순기능을 가지고 출발했고, 그 기능이 무너진 지점과 이유를 짚어보는 편이 훨씬 더 많은 것을 설명해 줍니다.
참고자료:
-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데이터베이스 조선왕조실록 선조·숙종·영조실록 관련 기록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붕당정치, 예송, 환국(경신·기사·갑술), 탕평책 관련 항목
- 이태진, 「당파성론 비판」, 『한국사 시민강좌』 1호(일조각, 1987)
붕당정치의 결산: 공존 체제가 무너진 대가
붕당정치가 처음에 가져다준 이익은 분명했습니다. 정권을 주고받으며 서로의 정책을 검증하는 구조는 한 세력의 권력 독점을 견제했고, 서인과 남인이 50여 년간 서로를 완전히 배제하지 않은 것도 그 덕분입니다.
손실은 공존의 전제가 사라지면서 생겼습니다. 1659년 기해예송과 1674년 갑인예송으로 효종의 왕위 정통성을 둘러싼 논쟁이 존립 문제로 번졌고, 숙종 대 1680년 경신환국과 1689년 기사환국, 1694년 갑술환국은 정권을 일괄 교체하며 견제를 숙청으로 바꿨습니다. 이를 되돌리려는 탕평론과 1729년 기유대처분은 붕당을 국왕의 힘으로 눌렀을 뿐 이권 구조를 바꾸지는 못했습니다.
프레임의 비용도 계산해야 합니다. 변질의 근본 원인은 관직과 경제적 이권의 독점이었는데, 식민지 시기의 당쟁 서사는 이를 민족성 탓으로 돌렸고, 이 시각은 1980년대 이후 이태진 등의 연구로 비판받았습니다. 사건의 경과는 국사편찬위원회 조선왕조실록 DB와 서울대 규장각한국학연구원 소장 자료에서 직접 확인할 수 있습니다.
심화 질문으로 보는 붕당정치의 이면 (FAQ)
Q1. 구양수의 붕당론은 왜 조선 사림에게 중요했나요?
붕당을 군자가 도를 같이하는 결집으로 읽는 구양수의 논리는 사림이 자신들의 정치 결사를 긍정하는 근거로 쓰였다고 설명됩니다. 다만 같은 논리는 상대를 소인으로 규정하는 흑백논리로 이어질 위험도 안고 있었습니다.
Q2. 예송논쟁이 정책 논쟁에서 존립 논쟁으로 바뀐 이유는 무엇인가요?
1659년 기해예송과 1674년 갑인예송은 자의대비의 상복 기간을 둘러싼 논쟁이었지만, 차남으로 왕위에 오른 효종을 적장자와 같이 대우할지라는 왕위 정통성 문제와 직결되어 있었습니다. 이 때문에 상대의 주장을 틀렸다고 보는 데서 그치지 않고 상대를 소인으로 가르는 데까지 나아갔습니다.
Q3. 환국정치는 왜 붕당 간 공존을 끝냈나요?
숙종은 1680년 경신환국, 1689년 기사환국, 1694년 갑술환국에서 정권을 한꺼번에 교체했습니다. 정권이 바뀔 때마다 밀려난 쪽이 몰락하는 구조에서는 상대를 견제할 대상이 아니라 제거할 대상으로 보게 되어, 붕당은 견제의 장치에서 숙청의 수단으로 바뀌었습니다.
함께 보면 좋은 글
-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데이터베이스 (조선왕조실록)
- 한국학중앙연구원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 서울대학교 규장각한국학연구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