칠지도 명문 논쟁으로 본 백제와 왜, 하사인가 헌상인가

칠지도는 백제가 일본에 준 선물일까요, 일본이 백제에게서 받아 낸 공물일까요? 같은 61자 안팎의 글자가 읽는 사람에 따라 정반대의 외교 문서가 됩니다.

칠지도 명문 논쟁은 ‘후왕’이라는 두 글자, 태화인지 봉원인지 갈리는 연호, ‘위왜왕지조’의 동사 해석 세 곳에서 갈립니다. 칼 한 자루가 4세기 동아시아 질서를 두 가지로 다시 쓰게 하는 셈입니다.

백제와 왜 가운데 누가 무엇을 얻었는지, 해석별 득실을 사료 순서대로 따져 보겠습니다.

칠지도 명문 논쟁을 다룬 삼국사 배너

칠지도란 무엇이며 명문에는 무엇이 새겨져 있는가

칠지도는 1873년 이소노카미 신궁의 대궁사가 칼에 슬어 있던 녹을 제거하는 과정에서 표면에 새겨진 글자를 발견하면서 세상에 알려졌습니다.

칼의 앞면에는 34자에서 35자, 뒷면에는 27자가 새겨져 있어 총 61자에서 62자로 추정되며, 훗날 X선 촬영으로 육안으로 보이지 않던 글자가 추가로 확인되기도 했습니다.

앞면에는 제작 연대와 함께 “백 번 단련한 쇠로 칠지도를 만들었으니 온갖 적병을 물리칠 만하며 후왕에게 나누어 줄 만하다”는 취지의 문장이 새겨져 있습니다.

뒷면에는 “지금까지 이런 칼은 없었는데 백제 왕세자가 왜왕을 위하여 만들게 하였으니 후세에 전하여 보이라”는 내용이 담겨 있습니다.

문제는 이 짧은 문장 안에 등장하는 몇몇 글자와 표현이 마모와 부식으로 판독 자체가 갈리고, 같은 글자라도 해석에 따라 정반대의 의미로 읽힌다는 점입니다.

명문 해석을 가르는 핵심 쟁점, 후왕과 하사·헌상의 갈림길

칠지도 명문 논쟁의 첫 번째 갈림길은 앞면에 등장하는 “후왕”이라는 표현을 누구로 볼 것인가 하는 문제입니다.

“先世以來未有此刀 百濟王世[子]奇生聖音 故為倭王旨造 傳示後世” (지금까지 이런 칼은 없었는데, 백제 왕세자 기생성음이 왜왕을 위해 만들어 후세에 전하라)
— 이소노카미 신궁 칠지도 뒷면 명문(통설적 판독과 번역, 글자 일부는 판독이 갈림)

이 짧은 기록에서 주목해야 할 행간의 의도는 ‘위왜왕지조’의 주어와 수혜자입니다. 백제 왕세자가 만들어 왜왕에게 준다는 구조는 분명하지만, 그것이 신하의 헌상인지 윗사람의 하사인지는 문장에 적혀 있지 않습니다. 앞면의 ‘후왕에게 줄 만하다’는 구절과 합쳐 읽을 때에야 비로소 위계가 해석으로 만들어집니다.

또한 이 명문은 백제 측이 만든 기록이고 일본 쪽 문헌과 교차 검증이 어렵다는 한계가 있습니다. 어느 해석도 명문 한 편만으로는 증명하지 못하며, 글자의 마모 때문에 결론이 연구자의 전제에 기대는 정도가 큽니다.

후왕은 원래 중국식 책봉 질서에서 황제 아래 제후에 해당하는 왕을 가리키는 말이어서, 이 글자를 누구에게 적용하느냐에 따라 백제와 왜의 위상이 완전히 뒤바뀝니다.

두 번째 갈림길은 칼을 만든 연대를 나타내는 연호를 어떻게 읽느냐인데, 오랫동안 통용된 “태화 4년”이라는 판독과 최근 제기된 “봉원”이라는 판독이 서로 다른 연대를 가리킵니다.

세 번째 갈림길은 뒷면의 “위왜왕지조”라는 구절을 백제가 왜왕을 위해 만들어 준 것으로 볼 것인지, 왜왕에게 바치기 위해 만든 것으로 볼 것인지에 대한 동사 해석의 차이입니다.

이처럼 글자 하나, 연호 하나의 판독 차이가 백제와 왜 사이의 권력 관계를 하사 관계로도, 헌상 관계로도 읽히게 만드는 구조가 이 논쟁의 본질입니다.

일본 학계의 해석: 헌상설과 태화 369년

전통적인 일본 학계는 칠지도의 연호를 동진의 연호인 태화로 읽고 제작 연대를 369년으로 비정해 왔습니다.

이 연대는 일본의 역사서인 일본서기에 백제가 왜에 칠지도를 바쳤다고 기록된 대목과 시기적으로 맞아떨어진다는 점에서 오랫동안 정설처럼 취급되었습니다.

이 해석을 따르면 명문 속 후왕은 백제에 복속한 지방 세력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백제가 상국인 왜에 예물을 바쳤다는 헌상의 문맥으로 읽히게 됩니다.

이러한 헌상설은 일본서기가 전하는 왜의 한반도 남부 지배, 이른바 임나일본부설을 뒷받침하는 물증으로 오랫동안 활용되어 왔습니다.

즉 일본 학계의 전통적 독법에서는 칠지도가 단순한 외교 선물이 아니라 왜가 백제보다 우위에 있었다는 서사를 뒷받침하는 핵심 근거로 기능했습니다.

한국 학계의 해석: 하사설과 분국설 논쟁

이러한 흐름에 정면으로 반론을 제기한 것은 1960년대 북한의 김석형이었으며, 뒤이어 남한의 이병도를 비롯한 여러 연구자가 하사설을 정교화했습니다.

이들은 삼국시대 금석문에서 백제나 신라가 중국 연호를 그대로 사용한 사례가 확인되지 않는다는 점을 근거로, 칠지도의 연호 역시 백제 고유의 연호일 가능성이 높다고 보았습니다.

이 관점에서는 명문 속 후왕이 백제에 복속한 왜의 왕을 가리키며, 칼을 만든 주체인 백제 왕세자가 아랫사람인 왜왕에게 칠지도를 내려준 것으로 읽힙니다.

김석형은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고대 삼국이 일본 열도 안에 분국을 세웠다는 이른바 삼한삼국 분국설을 제기하며 임나일본부설 자체를 정면으로 부정했습니다.

한국 학계의 하사설은 왜가 백제보다 우위였다는 전제를 뒤집고, 오히려 백제가 왜에 대해 우월한 위치에서 문물을 전해 준 관계로 4세기 후반의 한일 관계를 재구성했습니다.

칠지도 명문 논쟁의 최근 연구 동향, X선 재판독과 408년설

2000년대 이후에는 명문을 둘러싼 논쟁이 단순한 이념 대립을 넘어 실제 글자를 다시 판독하는 정밀 조사 단계로 옮겨 갔습니다.

홍성화 교수와 박남수 연구원 등은 X선 촬영을 통해 기존에 5월로 읽혔던 날짜가 실제로는 11월 또는 12월 16일에 가깝다는 점을 제시했습니다.

이들은 연호 역시 태화가 아니라 봉원으로 읽어야 한다고 주장하며, 이 경우 칠지도의 제작 연대가 369년이 아니라 408년, 곧 백제 전지왕 4년에 해당한다고 보았습니다.

이 견해에 따르면 칠지도는 왜가 백제를 군사적으로 지원한 데 대한 답례로, 전지왕이 왜왕을 후왕으로 인정하며 하사한 칼이라는 새로운 맥락에서 설명됩니다.

연대와 판독이 달라지면서 칠지도는 단순한 우호의 선물이 아니라 5세기 초 백제 중심의 국제 질서를 보여 주는 자료로 재조명되고 있습니다.

칠지도 명문 논쟁, 남은 쟁점과 학계의 현재 시각

다만 408년설이 나왔다고 해서 논쟁이 완전히 끝난 것은 아니며, 태화 연호와 369년 제작을 지지하는 연구자도 여전히 존재합니다.

일본 학계 내부에서도 전통적 헌상설을 그대로 고수하기보다, 백제와 왜가 대등한 우호 관계에서 예물을 주고받았다는 절충적 해석을 취하는 연구자가 늘어나는 추세입니다.

부식과 마모로 손상된 명문의 특성상 새로운 촬영 기술이 등장할 때마다 판독이 조금씩 수정될 가능성은 앞으로도 열려 있습니다.

그럼에도 최근 수십 년의 연구 흐름을 보면, 왜가 일방적으로 우위에 있었다는 전통적 헌상설 하나만으로는 설명이 부족하다는 지적이 늘고 있습니다.

4세기 후반의 한일 관계를 이해하는 무게 중심이 조금씩 옮겨 가고 있는 셈입니다.

칠지도 해석의 손익계산서: 누가 무엇을 얻고 잃는가

헌상설을 택하면 일본 쪽 서술이 얻는 것은 4세기 야마토 정권의 우위입니다. 369년 태화 연호 판독은 『일본서기』의 한반도 기사와 맞물려 임나일본부설의 근거로 활용되었고, 이는 식민지 시기 역사 서술이 가져간 정치적 이득이기도 했습니다. 반대로 잃는 것은 명문 자체의 문면입니다. 칼에는 ‘바친다’는 동사가 직접 적혀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하사설과 408년설은 백제의 외교적 위상을 높이는 대신 판독의 불확실성이라는 값을 치릅니다. X선 재판독으로 연호와 날짜를 달리 읽는 견해가 나왔지만 글자가 마모되어 합의에 이르지 못했고, 이 쟁점은 지금도 열려 있습니다.

결국 남는 것은 해석이 아니라 물건입니다. 칠지도는 일본 나라현 이소노카미 신궁에 보관되어 온 칼이며, 가지가 좌우로 뻗은 독특한 형태와 금으로 상감한 글자의 흔적이 지금도 논쟁의 유일한 원자료로 남아 있습니다.

심화 질문으로 보는 칠지도 명문 논쟁의 이면 (FAQ)

Q1. 태화 4년과 봉원 판독 가운데 어느 쪽이 연대 해석에 더 큰 영향을 주나요?

태화 4년으로 읽으면 369년이 되어 4세기 후반 백제와 왜의 관계를 설명하는 자료가 되고, 봉원으로 읽는 견해는 408년으로 보아 5세기 초 전지왕 시기의 외교 문서로 봅니다. 연호 한 글자가 칼의 제작 시기를 약 40년 옮기므로 하사설과 헌상설의 근거도 함께 달라집니다.

Q2. 후왕이라는 표현이 왜 하사와 헌상을 가르는 열쇠가 되나요?

후왕은 중국식 책봉 질서에서 황제 아래의 제후를 가리키는 말입니다. 그래서 이 말을 왜왕에게 적용하면 백제가 윗자리에서 내려 준 것이 되고, 백제왕을 후왕으로 보면 바친 것이 됩니다. 문장 구조만으로는 어느 쪽인지 확정되지 않아 해석이 갈립니다.

Q3. X선 촬영은 논쟁을 정리했나요, 아니면 새 쟁점을 만들었나요?

X선 촬영으로 육안으로 보이지 않던 글자가 추가로 확인되었지만, 같은 사진을 두고 날짜와 연호를 다르게 읽는 견해가 나와 합의에는 이르지 못했습니다. 기술이 판독 후보를 늘렸을 뿐 해석의 차이를 없애지는 못한 셈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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