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 과거제 도입 쌍기: 호족 세습을 부순 958년 권력 교체의 진실
유교적 소양을 갖춘 인재를 실력으로 선발한다는 과거제는 흔히 문치주의 국가로 나아가는 도덕적 진보의 상징으로 여겨집니다. 그러나 10세기 한반도의 정치 지형에서 고려 과거제 도입 쌍기: 그 실체는 낭만적인 학문 숭상과 거리가 먼, 피비린내 나는 권력 투쟁의 산물이었습니다. 956년 노비안검법으로 지방 호족들의 사병과 사적 재정을 옥죈 광종에게 가장 절실했던 것은 개국공신의 혈통적 관직 독점권을 영구히 파괴할 새로운 지배 엘리트 집단이었습니다. 후주(後周)에서 귀화한 이방인 책사 쌍기를 앞세워 단행한 958년의 시험 선발이 왜 구신 세력에게는 사형 선고와 같았는지, 그리고 이 제도가 음서제와 어떻게 타협하며 중세 관료제를 형성했는지 사료의 궤적을 짚어봅니다.

공신 세력의 세습 독점과 후주 귀화 지식인의 파격 발탁
태조 왕건이 세운 고려 초기의 권력 구조는 사실상 호족들의 연립 정권이었습니다. 삼한공신으로 불리는 개국공신들과 그 자제들은 무예와 가문의 군사력만을 앞세워 조정의 정승 판서 자리를 독점했고, 중앙 정부의 행정 실무는 여전히 토착 세력의 자의적인 판정에 좌우되었습니다. 이 체제에서 국왕은 강력한 전제군주가 아니라 제1의 호족에 불과했습니다. 왕권을 위협하는 외척 공신들의 난립 속에서 즉위한 광종은 기존 지배층과 혈연이나 지연으로 얽히지 않은 완전히 독립된 정치 세력이 필요했습니다.
이때 역사의 전면에 등장한 인물이 바로 후주의 시영(세종)이 파견한 책봉사 설긍의 수행원이었던 쌍기(雙冀)였습니다. 병을 앓아 개경에 체류하게 된 쌍기의 박학다식함과 5대 10국의 선진 관료제 지식을 간파한 광종은 그를 후주 조정에 요청해 고려의 신하로 영입했습니다. 광종은 쌍기에게 곧바로 원보(元甫)라는 고위 관등을 내리고 한림학사에 제수했으며, 이는 대대로 무공을 세워 지위를 굳힌 토착 공신들에게 심각한 박탈감과 경계심을 불러일으켰습니다.
| 비교 항목 | 초기 개국공신 세습 체제 | 958년 쌍기 건의 과거제 체제 |
|---|---|---|
| 인재 선발 기준 | 혈통, 가문의 군사적 공로, 사병 동원력 | 유교 경전 이해도(명경과), 제술 문예 능력(제술과) |
| 정치적 충성 대상 | 개별 호족 문벌 및 가문 수장 | 시험 주관자(좌주) 및 최종 임명권자인 국왕 |
| 지배층의 성격 | 지방 자치 군벌적 성향의 무신 귀족 | 국가 문서 작성과 조세 행정에 능통한 중앙 문신 관료 |
| 신분 재생산 방식 | 공신전과 관직의 사실상 무제한 세습 | 경쟁 선발을 거친 관료 진입 및 음서제와의 복합 공존 |
고려 과거제 도입 쌍기: 고려사 선거지와 광종세가의 사료적 진실
958년(광종 9년), 광종은 쌍기의 건의를 받아들여 한국사 최초로 국가가 주관하는 시험 선발제도를 단행했습니다. 문장을 시험하는 제술과(製述科), 유교 경전을 시험하는 명경과(明經科), 그리고 법률·회계·의학 등을 다루는 잡과가 설치되었습니다. 당시의 전격적인 제도 개혁은 관찬 사서인 고려사에 명료하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9년(958) 여름 5월에 처음으로 과거를 설치하여 한림학사 쌍기에게 명하여 진사를 취하게 하니, 갑과에 강은(康隱) 등 2인, 명경에 3인, 복업에 2인을 뽑았다.”
— 『고려사』 권73 지 제27 선거1 과목1
이 짧은 구절에서 주목해야 할 단어는 ‘쌍기에게 명하여(命雙冀)’와 첫 장원 급제자인 ‘강은(康隱)’입니다. 시험의 전권을 토착 호족이 아닌 외래 출신 쌍기에게 일임한 것은, 시험 출제와 채점 과정에서 발생할 수 있는 호족들의 사적 청탁과 혈연적 카르텔을 원천적으로 차단하겠다는 광종의 단호한 의지였습니다. 실제로 급제자 강은을 비롯한 초기 합격자들은 구세력의 군사적 기반이 전무한 순수 문인 출신이었으며, 이들은 곧바로 광종의 직속 친위 관료로 흡수되었습니다.
사료의 행간을 뜯어보면 구신들의 반발은 상상을 초월했습니다. 최승로의 상소문에 따르면, 광종이 쌍기를 총애하여 지나치게 높은 벼슬을 주고 중국 귀화인들에게 저택과 전답을 무분별하게 하사하자 원망이 하늘을 찔렀다고 전합니다. 칼 한 자루로 삼한을 통일한 자부심에 차 있던 무신 공신들에게, 붓을 놀려 시와 부(賦)를 짓는 것으로 관직의 높고 낮음을 결정한다는 규칙 변경은 자신들의 정치적 생명을 끊으려는 선전포고와 다름없었던 것입니다.
좌주문생(座主門生) 관계 형성과 왕권 강화의 연결고리
쌍기가 시험관인 지공거(知貢擧)를 맡아 선발한 과거 제도는 고려 특유의 좌주문생(座主門生) 제도를 탄생시켰습니다. 시험을 주관한 좌주와 급제자인 문생은 부자(父子)에 비견될 만큼 끈끈한 학문적·정치적 결속을 맺었습니다. 광종은 이 사제 관계의 정점에 국왕 자신이 위치하도록 설계했습니다.

과거를 통과한 신진 관인들은 군사적 사병도, 지방 대토지도 가지지 못했기에 오직 국왕의 신임과 관료 봉록에만 생존을 의존해야 했습니다. 광종은 이들을 도구 삼아 960년 백관의 공복(자·단·비·녹)을 제정하여 위계질서를 확립했고, 뒤이어 개국공신 박수경의 아들들을 비롯한 호족 세력과 왕실 종친들에 대한 피의 대숙청을 단행했습니다. 956년 노비안검법으로 호족의 팔다리를 잘라낸 광종은 958년 과거제를 통해 그 빈자리를 충성스러운 관료 집단으로 완벽히 채워 넣었던 것입니다.
과거제와 음서제의 공존: 고려 귀족 관료제의 정치적 손익
광종의 급진적인 과거제 도입은 고려를 일거에 문치 국가로 탈바꿈시켰으나, 귀족 사회 전체를 완전히 해체하지는 못했습니다. 광종 사후 호족 세력의 반동과 체제 정비 과정을 거치며 성종 대에 이르러 음서제(蔭敍制)가 제도적으로 안착했습니다. 5품 이상 고위 관료의 자제에게 무시험으로 관직을 부여하는 음서제는 과거제라는 능력주의와 정면으로 충돌하는 장치였습니다.

그러나 이 양 제도의 기묘한 공존이야말로 고려 사회의 독특한 절충점을 보여줍니다. 신흥 가문은 과거를 통해 중앙 정계로 진입할 수 있는 계급 상승의 사다리를 얻었고, 기존 문벌귀족은 음서를 통해 가문의 사회경제적 기득권을 대물림할 수 있었습니다. 특히 고려의 문벌귀족들은 음서로 관직에 진출한 뒤에도 자신의 정치적 권위를 높이기 위해 다시 과거에 응시하는 경향을 보였습니다. 이는 광종과 쌍기가 심어놓은 ‘문예 능력에 대한 사회적 공인’이 거스를 수 없는 국가적 규범으로 자리 잡았음을 방증합니다.
신라는 폐쇄적인 골품제로 인해 능력이 있어도 6두품은 6품 아찬을 넘지 못하는 신분적 천장에 갇혀 결국 체제 붕괴를 맞이했습니다. 반면 고려는 쌍기의 건의로 출발한 과거제를 통해 비록 제한적이나마 지배층을 개방하고 수혈하는 자기 갱신 시스템을 확보했습니다. 무력 중심의 군벌 연합체였던 고려는 이로써 500년을 지탱할 관료제적 기틀을 완성할 수 있었습니다.
오늘날 광종의 개혁과 쌍기의 발자취는 문헌과 유적 속에 오롯이 살아 있습니다. 쌍기가 광종의 후원을 받아 머물며 불교계와 교류했던 개경의 사찰 터들과, 황제국 고려의 당당한 위용을 보여주는 개성 만월대(유네스코 세계유산) 축대는 과거 급제자들이 왕명을 받들던 웅장한 공간의 실체를 증언합니다. 또한 국립중앙박물관에 보존된 고려 시대 금석문 탁본들은 당시 과거에 급제하여 가문을 일으킨 신진 관인들의 자부심을 생생하게 전하고 있습니다.
자주 묻는 질문 (FAQ)
Q1. 광종은 왜 토착 고려 지식인을 제쳐두고 굳이 후주 출신의 쌍기를 시험관으로 기용했나요?
당시 고려 내의 유학자들은 대부분 지방 호족이나 개국공신 세력과 혈연, 지연, 학맥으로 깊이 얽혀 있어 공정한 시험 관리가 불가능했습니다. 광종은 기존 권력 지형과 아무런 연고가 없는 이방인 쌍기를 지공거(시험관)로 삼아 토착 호족들의 청탁을 원천 차단하고 왕권에만 충성하는 신진 관인을 발탁하고자 했습니다.
Q2. 958년 도입된 과거 시험 과목 중 왜 제술과가 명경과보다 더 우대받았나요?
제술과는 시(詩), 부(賦), 책(策) 등 문장력과 정책 논술 능력을 평가했고, 명경과는 유교 경전의 암기와 해석을 평가했습니다. 황제국 체제를 선포하고 대중국 외교 문서와 국가 통치 문서를 독자적으로 작성할 실무 관료가 절실했던 고려 조정의 현실적 필요에 따라 정책 입안 능력을 갖춘 제술과 급제자가 최고위 관직으로 진출하는 주류를 형성했습니다.
Q3. 고려의 음서제가 강력했는데도 과거제가 폐지되지 않고 유지된 이유는 무엇인가요?
음서제가 귀족 가문의 기득권을 보호하는 수단이었다면, 과거제는 능력이 뛰어난 신진 인재를 수혈해 체제의 경직화를 막는 안전판 역할을 수행했습니다. 또한 문벌귀족이라 할지라도 과거에 합격해야만 재상(재추) 등 실질적인 권력의 핵심 요직으로 승진할 수 있는 명분을 얻었기 때문에 과거제는 고려 지배층 내부의 필수적인 정당성 검증 도구로 존속했습니다.
Q4. 과거제를 건의한 쌍기는 이후 고려 조정에서 어떻게 되었나요?
쌍기는 과거제 시행 이후 한림학사를 거쳐 좌승(佐丞)에 오르는 등 광종의 절대적 신임을 받으며 관직 생활을 이어갔습니다. 광종은 쌍기의 아버지 쌍철(雙哲)까지 고려로 불러들여 극진히 우대했으나, 구신 세력의 극심한 견제와 반발을 샀으며 광종 사후 귀화 관료에 대한 우대 정책이 축소되면서 점차 사료의 중심에서 물러났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