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국시대 성곽과 산성은 어떤 역할을 했을까

산성의 진짜 역할은 성을 지키는 것이 아니라 성 밖의 모든 것을 포기하는 것이었습니다. 삼국시대 성곽 산성 역할을 이해하려면 성벽의 높이보다 먼저 성 밖의 곡식을 비우고 적에게 남기지 않는 청야입보 전술의 냉정한 계산을 보아야 합니다.
평소에는 평지의 농경지 곁에서 살다가 대군이 쳐들어오면 곡식과 물자를 챙겨 산성으로 올라가고, 남은 것은 태웠습니다. 침입자가 현지에서 보급을 받지 못하게 하고 험한 지형에서 소모전을 강요하는 구조였습니다.
고구려와 백제, 신라가 각자의 지형과 적에 맞게 이 전술을 어떻게 다르게 구현했는지 기록과 유적의 순서대로 따라가 보겠습니다.
청야 전술과 산성, 왜 이 조합이었을까
삼국의 산성을 이해하려면 당대의 전형적인 방어 전술이었던 ‘청야입보(淸野入保)’를 먼저 알아야 합니다. 평소 백성들은 농경지 인근의 평지성 주변에서 생업에 종사했지만, 대규모 적군이 국경을 넘어오면 상황이 완전히 달라졌습니다. 국왕과 장수들은 평지의 곡식과 물자를 챙겨 산성으로 이동했고, 때로는 남은 가옥과 곡식을 태워 적이 현지에서 보급을 확보하지 못하도록 했습니다.
이 전술이 통했던 이유는 지형에 있습니다. 원정 온 적군은 산성의 가파른 경사를 오르며 소모전을 강요당했고, 방어 측은 소수의 병력으로도 지치고 굶주린 적을 지연시킬 수 있었습니다. 산성은 단순한 요새가 아니라, 이런 지연전을 가능케 하는 전략적 장치였던 셈입니다.

그렇다면 삼국은 성을 똑같은 방식으로 쌓았을까?
그렇지 않습니다. 각국이 처한 지리적 환경과 주로 상대했던 적의 성격에 따라 축성 방식에도 차이가 있었습니다. 고구려는 북방의 기동력 있는 세력과 중국 왕조의 대군을 상대해야 했기에, 평지성과 산성을 유기적으로 연결하고 성벽에 돌출된 ‘치(雉)’를 배치해 측면 방어력을 높이는 방식을 발전시켰습니다. 백제는 한강·금강 유역에서 토성 축조 기술(판축 기법)을 바탕으로 출발해 점차 석축 기술을 더해갔고, 신라는 길쭉한 돌을 정교하게 맞물려 쌓는 독자적인 석축 기법을 완성했습니다.
대표적인 유적으로는 고구려의 백암성·오녀산성·환도산성, 백제의 몽촌토성·부소산성, 신라의 월성·삼년산성 등이 꼽히며, 이들은 오늘날까지도 당시 축성 기술을 보여주는 자료로 남아 있습니다.
안시성이 당태종을 물러서게 한 배경
645년 고구려와 당나라가 맞붙은 안시성 전투는 성곽 방어 체계의 가치를 잘 보여주는 사례로 꼽힙니다. 당태종이 이끄는 대군은 요동성, 개모성, 백암성 등을 잇달아 함락시키며 진격했지만, 안시성 앞에서 두 달 가까이 발이 묶였습니다.
여기서 흥미로운 점은, 안시성이 단독으로 버틴 것만은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관련 연구에 따르면 안시성이 정면에서 공격을 받는 동안, 북쪽의 신성과 남쪽의 건안성에서도 고구려군의 저항이 계속 이어지고 있었습니다. 이 때문에 당태종은 안시성을 우회해 곧장 평양으로 진격하자는 일부 신하들의 제안을 받아들이지 못했습니다. 배후에 저항하는 성들을 남겨둔 채 황원정군을 이끌고 더 깊이 들어가는 것은 위험 부담이 너무 컸기 때문입니다. 결국 당군은 안시성을 넘지 못한 채 퇴각했고, 이는 고구려 방어망이 개별 성이 아니라 여러 성이 서로를 지탱하는 구조로 작동했음을 보여주는 사례로 평가됩니다.
"장성을 쌓기 시작하여 동북으로 부여성에서 서남으로 바닷가에 이르기까지 천여 리였고, 16년 만에 마쳤다." (영류왕 14년(631) 천리장성 축조 기사의 취지 의역)
— 『삼국사기』 고구려본기 영류왕 14년 기사 (취지 의역, 번역본마다 표현 다름)
이 짧은 기록에서 주목해야 할 행간의 의도는 16년이라는 시간입니다. 방어선을 쌓는 데 한 세대에 가까운 시간이 들었다는 것은 이 방어 체계가 군사적 계산이면서 동시에 막대한 노역과 재정의 부담이었음을 시사합니다.
다만 천여 리라는 거리와 현재 확인된 유적이 어떻게 대응하는지는 연구자마다 해석이 갈립니다. 숫자는 규모의 감각으로 읽고, 실제 노선과 구조는 고고학 조사로 따로 확인해야 합니다.

신라 삼년산성은 정말 난공불락이었을까
충북 보은의 삼년산성은 신라 자비마립간 때 축조를 시작해 3년 만에 완성했다고 하여 이런 이름이 붙었습니다. 실측 조사에 따르면 외벽 높이는 약 13~14m, 하부 보강 구조를 포함한 전체 높이는 약 20m, 폭은 8~10m에 이르는 것으로 확인됩니다. 얇고 긴 돌을 가로세로로 교차해 쌓아 견고함을 높인 축성 방식이 특징입니다.
삼국시대 당시 백제와 고구려가 이 성을 공격해 함락시켰다는 기록은 확인되지 않습니다. 다만 이를 “영원히 함락되지 않은 철옹성”이라고 단정하기는 어렵습니다. 통일신라 말 혼란기를 거쳐 후삼국시대에는 후백제 견훤의 세력권에 들어갔고, 918년 고려 왕건이 이 성을 되찾으려 공격했으나 오히려 크게 패한 기록이 남아 있습니다. 즉 ‘삼국시대 한정’으로는 함락된 기록이 없다는 것이 정확한 표현이며, 이후 시대까지 포함해 무조건 난공불락이었다고 서술하는 것은 과장입니다.

사료 속 병력 수치, 어디까지 믿어야 할까
공성전 기록을 읽을 때 자주 마주치는 어려움이 병력 수치입니다. “수십만 대군”, “성안 군사 전멸” 같은 표현은 삼국사기나 중국 측 사서 모두에서 종종 등장하는데, 이런 수치는 당대의 정치적 목적에 따라 과장되었을 가능성이 항상 검토 대상입니다.
이런 한계를 보완하는 방법 중 하나가 고고학적 접근입니다. 산성 내부 집수지(우물·연못 터)나 식량 창고의 규모를 통해 해당 성에 상주할 수 있었던 병력 규모를 역으로 추정하는 연구들이 있습니다. 이런 연구들은 대체로 대규모 정면 충돌보다는, 산성을 거점으로 한 지연전과 매복전이 실제 전투의 주된 양상이었을 가능성을 시사합니다. 사료의 수치를 그대로 받아들이기보다, 이런 실증적 자료와 함께 교차 검증하는 접근이 필요합니다.

삼국 성곽 비교
| 구분 | 고구려 | 백제 | 신라 |
|---|---|---|---|
| 주요 재료·기법 | 정교하게 가공한 석재 중심 석성 | 판축 토성에서 점차 석성으로 발전 | 길쭉한 석재를 교차해 쌓는 정밀 석성 |
| 방어 특징 | 돌출된 ‘치’를 통한 측면 방어 | 강줄기 등 자연 지형을 방어선으로 활용 | 급경사 성벽으로 접근 자체를 차단 |
| 대표 유적 | 백암성, 오녀산성, 환도산성 | 몽촌토성, 부소산성 | 경주 월성, 보은 삼년산성 |
이렇게 정리해놓고 보면, 삼국의 산성은 저마다 다른 지형과 적을 상대하며 발전한 결과물이라는 점이 눈에 띕니다. 단순히 ‘방어용 건축물’이라는 한 단어로 뭉뚱그리기보다는, 각국이 처한 조건에 대한 대응이었다는 관점에서 봐야 그 다양성이 더 잘 이해될 것 같습니다. 그리고 삼년산성의 사례처럼, ‘무너지지 않았다’는 서사는 종종 특정 시기에 한정된 이야기라는 점도 함께 기억해둘 만합니다.
참고자료:
-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데이터베이스 삼국사기 고구려본기 보장왕 조
- 국립문화재연구원, 문화재청 보은 삼년산성 관련 실측·발굴 조사 자료
- 한국학중앙연구원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안시성전투 관련 항목
산성 방어의 손익계산서: 소모시킨 적, 버려야 했던 땅
얻은 것은 시간과 소모였습니다. 험한 지형 위의 성벽은 대군의 보급을 끊고 공성에 많은 시간과 인력을 쓰게 만들었으며, 지방의 거점으로서 물자를 비축하고 통치하는 기능도 겸했습니다.
버려야 했던 것은 성 밖의 땅과 삶이었습니다. 평지의 곡식과 마을을 비워야 했고, 성을 쌓고 유지하는 노역은 백성의 몫이었으며, 천리장성처럼 한 세대에 가까운 시간이 걸린 공사는 국가의 재정과 인력에 큰 부담을 주었습니다.
이 장부의 마지막에 남는 것은 충북 보은 삼년산성의 길쭉한 돌을 교차해 쌓은 성벽입니다. 외벽 높이 십수 미터에 달하는 돌의 두께가 이 방어 체계가 요구한 노동과 기술의 크기를 지금도 보여 줍니다.
심화 질문으로 보는 삼국시대 성곽 산성 역할의 이면 (FAQ)
Q1. 청야입보 때 성 밖의 백성은 모두 산성에 들어갈 수 있었나요?
산성의 수용 규모에는 한계가 있었을 것이므로 모든 백성이 들어갈 수는 없었다고 보는 것이 합리적입니다. 사료의 수치는 과장 가능성이 있어 실제 수용 인원은 유적의 면적과 시설을 근거로 따로 추정해야 합니다.
Q2. 산성은 평지성을 대체했나요?
대체했다기보다 평시의 평지성과 위기 때의 산성을 짝지어 운영하는 체계로 설명됩니다. 특히 고구려에서 이런 구조가 두드러진다고 보지만 시기와 지역에 따라 달랐다는 점도 감안해야 합니다.
Q3. 천리장성은 실제 유적과 일치하나요?
기록에 전하는 천여 리의 방어선이 현재 확인되는 성곽 유적과 어떻게 이어지는지는 연구가 계속되는 주제입니다. 일부 구간이 확인되었다는 견해가 있으나 전체 노선을 확정하기는 어렵습니다.
함께 보면 좋은 글
참고자료 및 사료 출처
-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데이터베이스 (삼국사기, 삼국유사)
- 한국학중앙연구원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 문화재청 국가문화유산포털 및 국립중앙박물관